성경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정말 많이 나온다. 심지어 고린도전서 13장에는 이'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정의 하듯 서술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영생을 얻기위해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는 율법교사의 자문자답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해 옳다고 하시며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배중 목사님이 주변 사람에게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세요. 하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사랑한다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잘 나오지 않는다. 내가 단지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러는 것은 아닌 듯 하다. 그 말을 해야하는 순간에 나는 상대방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위해 어느정도 행했는지 자문하면서 사랑이 이렇게 입으로만 말해도 인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생각에 성도들 중 단상에서 '사랑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목사님과 1년에 한 번 이라도 식사는 고사하고 5분 이상의 대화를 나눈 사람이 극히 적을 것이다.
내가 앞에 있는 사람을, 길가는 사람을, 주변의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려면 누가봐도 저사람은 상대를 사랑하고 있구나 누낄수 있는 행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말로 사랑한다고 하다보면 언젠가는 사랑을 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는데 현실의 나는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하는데 익숙해져 이제는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더 무감각해지는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큰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것을 나누고 작은 행동을 하는 것도 크고 위대한 사랑이라고 확대 해석 하며 위로를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 그 정도도 못할 거면 차라리 웃으며 편안하고 자비로운 표정으로 사랑한다고 말이나 하지 말라고 눈을 흘긴다.
나는 내 아내, 내 가족을 사랑하기에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내 이웃에게까지 사랑한다고 자신있게 말 할 정도로 내 몸이 따라주지 못하고, 내 마음이 품어 주지 못한다. '이웃'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예수님은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말씀하셨다. 그 비유에서 일단 '강도'는 이웃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 '레위인' 역시 이웃이 아닐 것이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 이라고 인정하시며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이웃'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모든 제사장과 레위인이 나쁜 사람이라고 말해서도 안되고, 모든 사마리아 사람이 의인이고 이웃이라고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비유이며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셨던 것 같다. 쉽지는 않아도 나는 나에게 잘 해주고 자비를 베풀어 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그래도 좀 더 호의를 베풀고 잘 해 주게 되는 것 같다. 원수를 사랑할 정도의 힘든 일은 아니라서 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할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비를 베푼 내 이웃일지라도 '사랑'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그에 맞는 행동을 할 자신은 없다. 그 앞에서 '사랑 한다'고 반복적으로 미소지으며 말할 자신도 없다.
차라리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작은 도움이라도, 작은 자비라도 베풀고 부끄러워 하는 것이 처음보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포옹(?) 하는 것 보다 내 마음을 편하게 할 것 같다. 제발 예배시간에 그렇게 말하는 행동을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 한마디로 '퉁' 칠수 있다면 내 마음도 편하겠지만 타인에게 그 말을 할때마다 내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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